안녕하세요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창조주이자 우리의 사랑이신 아버지가 한 남자와 한 여자와 아름답고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겼을 때를 읽습니다. 그 남자와 여자는 관계를 끊고 그에게서 숨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아버지께서 그 남자와 여자를 동산 밖으로 내쫓으셨지만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그들을 정원에서 내쫓기 직전에 아름다운 가정 장면이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해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창세기 3:21).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아버지께서는 그 남자와 여자를 그분의 면전에서 추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갔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인간 자녀들과 거리를 둔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이야기는 그의 자녀인 우리가 그를 외면하고 그가 없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항상 그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항상 인간 자녀를 사랑했고 우리가 그를 사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만든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의 자녀인 우리는 그와 계속 거리를 두었습니다. 선지자의 두 구절은 사랑의 아버지께서 이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 알려줍니다.
“내가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너희를 내 자식처럼 대하고, 어느 나라보다 아름다운 땅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나는 너희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나를 따르는 것을 외면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예레미야 3:19)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나는 그를 사랑했고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을 부르면 부를수록 그들은 내게서 멀어졌습니다… … 에브라임의 팔을 잡고 걷는 법을 가르친 것은 나였지만, 그들은 그들을 고친 것이 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는 인간적인 친절의 끈으로, 사랑의 끈으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어린아이의 뺨을 들어주는 사람 같았고, 허리를 굽혀 젖을 먹이는 사람 같았습니다.” (호세아 11:1-4)
저는 특히 사랑의 아버지가 우리를 뺨으로 끌어안고 싶어 하는 이미지가 마음에 듭니다.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계신 분들은 이해하실 겁니다. 들어올려서 운반한다는 개념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약성경 구절 중 하나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분은 목자처럼 양 떼를 돌보십니다. 그는 양들을 팔로 모아 마음 가까이 안고 가십니다. 그분은 어린 아이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십니다.” ( 이사야 40:11)
우리의 사랑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안아주셔서 뺨에 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품에 안아 가슴에 품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그는 우리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어린아이가 사랑스러운 부모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과 계속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예수님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신과 거리를 두었던 종교 문화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신은 너무 거룩해서 인간이 다가갈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직을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두어 스스로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너무 거룩해서 그분의 이름조차 말하거나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거리를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원하셨던 사랑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면 내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내 아버지는 나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은 그를 모르지만 저는 그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저도 당신처럼 거짓말쟁이가 되겠지만, 저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요한복음 8:54-55)
예수님은 사랑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대로 친밀하고 사랑하며 신뢰하고 하나 되는 관계로 돌아가기를 항상 원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눅 15:11~32)보다 더 명확한 가르침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의 행동은 이기적이었고, 이는 죄악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분리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달려와 그를 안아주었습니다. 아이와의 화해를 갈망하던 아버지는 이제 그 아이가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화해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로 회복되었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약속은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갱신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즉 각 자녀의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이런 종류의 사랑을 갈망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그 사랑을 돌려주기를 갈망하는 부모님에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답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 12:30)
우리 모두가 사랑의 아버지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이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Peter O
관련 문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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